일기는 어떤 태도로 쓰는가
일기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일기에 관해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기라고 하면 우리는 ‘난중일기’나 ‘안네의 일기’와 같은 문학 작품을 전범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 관점에서 좋은 일기는 그날의 중요한 사건이 한 편의 소설처럼 전개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 사건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점, 배운 점, 반성한 점 등 주관적 견해들도 기록해야 한다. 즉, 좋은 일기는 사건에 대한 객관적 서술과 함께 분석 및 평가까지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일기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에세이가 되므로, 보통 사람이 쓰기는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기준을 너무 높게 잡으면 매번 패배감을 맛보며, 일기 쓰기는 포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기 쓰는 습관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먼저 일기에 대한 관념부터 바꿔야 한다.
첫째, 일기에는 사실만 기록한다.
일기를 쉽게 쓰려면 주관을 철저히 배제하고 사실만 기록해야 한다. 이런 일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모범적 사례는 구 소련의 과학자 알렉스더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1890~1972)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형식의 일기를 남겼다.
1964년 4월 8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어제 그렸던 곤충의 정체를 밝혀냄, 2시간 20분
- 이 곤충에 대한 논문 집필 시작, 1시간 5분
- 추가업무 : 다비도바야와 블랴헤르에게 편지, 여섯 쪽, 3시간 20분. 이동
- 휴식 : 면도,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지, 15분, 이즈베스티야지, 10분
- 문학신문, 20분, 톨스토이의 <흡혈귀>, 66쪽, 1시간 30분
-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황제의 신부> 감상
- 기본업무, 6시간 45분
위와 같은 일기를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문학적 소질이 아니라 기록하는 습관과 성실함 뿐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계획적으로 살고,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을 때가 많다. 매 순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만약,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서 먼가 써보고 싶다면, 마음껏 쓰고, ‘~에 관한 글쓰기 30분’과 같이 또 기록하면 된다.
둘째, 일기는 자기 전에 쓰는 것이 아니다.
일기(日記)는 하루(日)에 쓴 모든 기록(記)이다. 일기는 글쓰기가 아니라 기록 쪼가리들일 뿐이다. 따라서 정해진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반복해야 한다. 기록은 매듭짓기다. 기록을 중심으로 이전의 활동이 끝나고 새로운 활동이 시작된다. 어떤 행위를 하든 일기장을 곁에 두고 시간 매듭을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고 짧은 시간에 일기 쓰기 습관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기는 글쓰기가 아니라 기록 연습이다.
기록과 글쓰기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일기는 플래너나 다이어리 쓰기와 더 가깝다. 글쓰기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 독자가 있는 모든 글은 쓰기 어렵다. 그러나 일기는 독자가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꾸준히 기록하다 보면 점차 삶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글을 쓰지 않아도 기록만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니 글을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담담히 기록하는 습관부터 만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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