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요즘 아이들은 ‘돈미새’라는 말을 쓴다. ‘돈에 미친 새끼’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도 ‘돈미새’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인데, 매주 수업 시간마다 자신이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는지 자랑한다. 얼마 전에는 주식을 팔아서 5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자랑했다. 자기 말로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한다. 그 아이는 ‘별을 쫓으라’는 노랫말을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로 들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이 노래에 대한 오독이며 모독이다.
‘별’은 나의 외부에 고정된 좌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빛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성공이나 직업으로서의 꿈이 아니라 나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생의 박동이다. ‘별’이 뜨겁고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규격화된 구체적 목표가 아니라 나를 지탱하면서도 흔들어대는 근원적인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별 자체에 도달할 수 없으며, 끝까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별은 내가 지쳐 쓰러지던 밤, 네가 나를 떠난 밤에 더욱 빛난다. 역설적이게도 ‘별’은 인생의 정점에 도달하면 사라진다. 성공에 취한 사람은 자신이 별이 되었다고 믿으므로 더 이상 별을 찾지 않는다. 별은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슬픔과 좌절의 좌표이자 증거이다. ‘네가 떠난 밤’에 돈이 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돈을 무엇으로 교환하면 그 고통스러운 겹핍, 상실, 공백이 사라지느냐는 말이다. 별을 잃은 자는 자기 고통을 해석하고 극복할 능력을 상실하고 그저 성공과 행복이라는 가짜 별이 만든 중력에 속박될 뿐이다.
별을 따라가는 것은 구체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별을 쫓을 때 어디로 갈지 몰라 불안하다. 별은 행복이 확실히 보장된 미래의 어느 지점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확실해진다는 것은 누군가 미리 만들어놓은 질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며, 하나의 환상 속으로 진입한다는 뜻이다. '별'은 그 환상과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나라고 유혹하는 불온한 빛이다. 우리는 그 별빛을 통해 확실하고도 당연한 세상의 질서에도 틈새가 존재함을 깨닫는다.
‘돈 많은 백수’가 삶의 목표인 그 아이도 언젠가는 돈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비참한 밤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아이는 ‘돈 많은 백수’가 되는 유일한 수단인 상속을 위해, 돈 많은 부모의 이른 부고를 기다리는 괴물이 되지 않겠는가. ‘돈미새’나 ‘돈 많은 백수’와 같은 말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섬뜩한 물신화의 증상이다. 아이들은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자본주의적 상징적 질서에 포섭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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