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2장_기록과 사건

by 쓰다

이 글은 『신이 내린 필력은 없지만, 잘 쓰고 싶습니다』 의 2장을 보충합니다.


2장은 기록의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기록 방법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간 제가 사용했던 기록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하는 습관에 관해 몇 자 추가할까 합니다.

 

기록은 기억을 저축하는 행위입니다. 꾸준히 저축을 해두어야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글을 잘 쓰고 싶다고 하면서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모아둔 돈은 없는데 사고 싶은 건 많은 상황이랄까요. 저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께 글을 쓰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어차피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처음부터 좋은 글을 완성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기록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는 제가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문제 중 하나입니다. 노트 필기법이나 메모법 책을 따라해보고, 제 나름의 방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한 가지 방식으로 정착했습니다. 이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지는 않더라도 가장 즐거웠고, 무엇보다 글쓰기를 위해 현실을 ‘베어 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한 후, 저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데, 시간도 없고, 쓸 말도 없는 분들이라면 이 방법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플래너와 다이어리를 버리세요

 

기존의 플래너나 다이어리, 노트, 메모는 모두 선을 그어 놓고, 할 일이나 일정, 간단한 정보를 축약해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기록을 할 때, 완전한 문장을 쓰지 않고 단어만 나열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손으로 쓰는 플래너나 다이어리는 스마트폰의 일정·할 일 관리 앱의 효율성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수기식 플래너와 다이어리의 유일한 장점은 손으로 무엇인가를 쓰고, 꾸미는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플래너와 다이어리에 손수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예쁘게 꾸미는 일은 즐겁지만, 뭔가 제대로 쓰려면 새로운 노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도별로 다양한 노트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어떤 노트가 언제 필요한지 예측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여러 노트를 언제나 지니고 다니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노트는 단 한 권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집안 어딘가에 처박힙니다.

 

실패에서 뭔가 배우지 못하는 우리는 ‘이번에는 기필코 제대로 쓰겠다’고 다짐하며 새로운 노트를 구입하지만, 원대한 목표를 위해 구입한 노트는 곧 애물단지가 되고 맙니다. 뭔가 적혀 있으니 버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다시 무엇인가를 적기에는 생각의 흐름도 끊겼고 흥미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다시 플래너와 다이어리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플래너와 다이어리를 제대로 쓰는 것도 아닙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불렛 저널’(bullet journal)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일정, 할 일, 노트 등을 한 권에 담는 불렛 저널은 직접 손으로 모든 페이지를 만들어가는 재미를 주었고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일상을 기록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불렛 저널을 검색하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만의 저널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걸 보면 동기부여도 되고 뭔가 열심히 적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렛 저널 역시 일정과 할 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글쓰기에 특화된 기록 방식은 아닙니다. 저는 과감하게 저널에서 일정과 할 일을 기록하는 부분을 빼버렸습니다. 일정과 할 일은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앱스토어에 여러 앱들이 있지만 기본 기능은 비슷합니다. 요새는 기본 앱들만으로도 충분히 일정과 할 일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저는 ‘fantastical’이라는 앱 하나만 사용합니다. 더 복잡한 업무와 프로젝트를 하시는 분들이라면 GTD 방식의 ‘things’, ‘omnifocus’, ‘2Do’ 등을 사용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오직 한 권의 노트에 모든 것을 기록하세요

 

일정과 할 일이 빠진 저널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실 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쓰는 기록 방식을 소개하겠습니다. 저에게 특화된 방식이므로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불렛 저널 포맷을 따르되, 더 단순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상황에 맞게 활용하시면 됩니다. 단, 아래의 세 원칙만은 가능하면 지키시는 게 좋습니다.

 

RULE 1. 단 하나의 노트만 사용한다

‘단 하나의 노트만 사용한다’는 원칙은 플래너와 노트를 구분할 때 오는 번잡함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가끔 ‘독서노트’와 같은 기능성 노트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과연 그 노트를 구입한 사람들 중에서 몇 %가 그 노트를 끝까지 썼을까요? 저는 그 값이 0에 수렴한다고 봅니다. 이런 노트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학생들은 그래도 수업 노트는 있어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수업 노트도 한 권에 씁니다. 저도 소싯적에는 한 필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트를 다시 들춰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어차피 시험 준비를 하려면 수업 노트를 바탕으로 따로 정리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트 필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핵심 요약이 아니라, 수업을 들으며 떠오른 자신의 질문과 생각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게 있어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을 붙들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읽고, 생각해야 글이 나오는 겁니다. 수업 시간에 교수가 떠드는 말들을 대충 요약해서 기록하는 건 글쓰기가 아닙니다.

 

저는 일기든, 강의/강연 준비든 뭐든 기록할 때는 오직 하나의 노트만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노트를 정리해서 인쇄본을 만듭니다. 노트가 초고로 탈바꿈하는 순간입니다. 꾸불꾸불한 글씨가 정갈한 폰트로 변형되고, 편집 스타일에 따라 인쇄되면 노트를 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느끼려면 일단 초고에 사용할만한 문장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권에 모든 것을 적다 보면, 놀랍게도 우리가 하루 종일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RULE 2. 미래의 할 일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과 생각에 집중한다

일정과 할 일은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일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을 기록합니다. 글을 쓰려면 언제나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있을 미팅 일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퇴근길에 마트에서 사야 할 물품 목록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트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기록해야 합니다. 업무에 관해 기록하더라도 지금 진행하는 업무에 문제는 없는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등을 기록하는 게 낫습니다. 단순한 일정 정리는 모두 스마트폰에 맡깁니다.

 

RULE 3. 완벽한 문장으로 쓴다

글쓰기를 위해서는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완벽한 문장으로 쓰라는 말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에 맞게 쓰라는 뜻만은 아닙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노트를 초고로 옮길 때 검토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와 서술어가 분명히 드러나는 완전한 문장 형태로 쓰는 것입니다. 기존의 플래너, 다이어리, 노트 필기 등은 모두 문장이 아니라 개념을 나열하는 방식입니다. 예컨대, “3월 16일 12시 길동과 점심 약속”과 같은 식입니다. 이걸 문장으로 쓰면 “나는 3월 16일 12시에 길동과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가 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적으로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문장 만드는 연습은 운동선수들이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몸풀기와 비슷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자다 일어나서 곧바로 경기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경기전 오랫동안 몸을 풀고, 근육을 이완시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트가 곧바로 초고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문장을 만들어야 하고, 단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노트의 기본 구조

 

이제 본격적으로 글쓰기 저널을 쓰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널은 크게 인덱스(Index), 주제어(Subject), 로그(Log), 노트(Note)로 구성됩니다.

 

 

  • 인덱스(Index)
    어느 저널에서나 볼 수 있는 목차입니다. 쪽수와 목차를 기록합니다.

 

  • 주제어(Subject)
    쓰기 저널 고유의 페이지입니다. 자신이 쓴 노트에서 주제어를 뽑아서 날짜와 함께 기록합니다(ex. 저널_190325). 주제어는 일 년 동안 자신이 어떤 문제를 고민하고 글을 썼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 로그(Log)
    노트에서 뽑아낸 정보들을 재구성합니다. 크게 이벤트 로그와 사용자 로그로 구분합니다. 이벤트 로그는 전통적인 캘린더 형태입니다. 월별, 일별로 노트에 기록된 사건들 중 중요한 것들을 기록합니다. 사용자 로그는 기록자가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는 로그입니다. 저는 책, 영화, 인물, 장소 등의 로그를 사용합니다. 기록자에 따라서 자신의 취미나 관심사를 반영한 추가 로그를 만들 수 있습니다.

 

  • 노트(Note)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노트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왼쪽 1/4 정도는 주제어와 어떤 로그인지 표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남겨둡니다. 예를 들어, 저는 Ⓑ를 ‘책’을 뜻하는 약어로 사용합니다. 노트에 Ⓑ라는 표시가 있다면, 책을 읽고 무엇인가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책은 앞 페이지의 로그에도 기록되어 있을 겁니다. 나머지 3/4는 노트를 위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앞에서 강조한 세 가지 규칙에 기초하여 기록자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쓸 수도 있고, 그림이나, 도표 등을 그릴 수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세요

기존의 플래너나 다이어리를 사용하면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쓰고 지우고, 고치고, 덧붙이고 다시 써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페이지가 지저분해집니다. 여기저기 찍찍 그은 선들과, 끼워 넣은 문장들과 잉크가 번진 자국들이 있어야 글쓰기 저널입니다. 그렇게 고치고, 이어 붙이고, 다시 쓴 문장들이 곧 자신의 생각이고, 그 문장 수준이 곧 생각의 수준입니다. 어떤 생각들은 계속 발전해서 여러 쪽을 쓸 수도 있고, 어떤 생각은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라도 계속 고민하고,  연관된 정보와 책을 찾아 읽다 보면 다시 쓸 게 생기고, 생각은 계속 나아갑니다. 아름답고 남들이 보기 좋은 플래너나 다이어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쌓여 썩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저널을 쓰세요. 그 문장들 속에서 분명 무엇인가 자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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