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_읽기와 쓰기
번역이 필요없는 문장을 쓰세요
난데없이 웬 번역 타령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저는 수강생에게 가능하면 번역이 필요 없는 문장을 쓰고, 어쩔 수 없다면 최소한의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번역이란 외국어 번역이 아니라, 한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너의 행동은 자유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냥 읽으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제 눈에는 ‘자유성’이라는 단어가 걸립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단어인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물리학에 ‘점근 자유성(asymptotic freedom)’이라는 개념이 있더군요. 설마 수강생이 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썼을 리는 없으므로 ‘자유성’은 ‘자유’로 고치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과정이 번역입니다. 읽기란 어쩔 수 없이 번역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을 읽습니다. 그래서 읽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쉽게 읽히지 않으면 읽기 싫어집니다. 저는 ‘자유성’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저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고, 저를 멈추게 한 그 개념이 사실은 '자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걸 알면 짜증이 납니다. 그냥 ‘자유’라고 썼으면 해결될 일입니다. 왜 저렇게 썼는지 궁금해서 글쓴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제 탓이더군요. 수업 시간에 인위성, 자율성, 보편성, 개별성, 절대성, 상대성 등의 개념을 설명했는데, 그걸 듣고 자유에도 자유성을 붙인 겁니다. 생각해보니 ‘자율성’은 되는데 ‘자유성’은 안될 이유도 없더군요. 하지만, 2019년을 사는 사람들은 ‘자유성’이라고 쓰면 그 단어를 ‘자유’로 번역해야만 이해할 수 있으니 그냥 ‘자유’라고 쓰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2050년 즈음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요.
너의 행동은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
처음에 쓴 문장보다는 이해하기 쉽지만, ‘행동은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문장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번역이 필요합니다. ‘행동은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는 말은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뜻이겠죠. 그러면 아래처럼 쓰면 되지 않을까요?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쓰니 ‘못한다’라는 서술어가 걸립니다. '못한다'는 무엇인가 금지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엄격한 기숙사 사감이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세요. 위 문장은 잘못 읽으면 “너는 자유롭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을 해결하려면 ‘못한다’를 ‘않는다’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썼더니, ‘너’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만약,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은데 어떤 외부 요인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아래처럼 쓸 수도 있습니다.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못한다/않는다'를 '못하고 있다'라고 바꾸니까 '너'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보조용언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유가 결여된 원인이 '너'의 의지인지, 외부 요인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정확한 표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너의 행동은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는 문장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워 번역을 해야 했습니다.
원문 : (1) 너의 행동은 자유가 결여되어 있다.
번역 : (2) 너는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저는 (1)을 읽고 무슨 뜻인지 대충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1)을 (2)로 번역했을 때,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처음부터 (2)처럼 쓰인 글이 훨씬 읽기 편하고 정확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2)로 쓰지 않고, (1)로 쓴 이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1)의 주어는 ‘너의 행동’이고 (2)의 주어는 ‘너’입니다. 누군가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싶을 때, ‘너는—‘이라고 시작하는 문장과 ‘너의 행동은—‘이라고 시작하는 문장은 비판 강도가 다릅니다. ‘너의 행동은—‘은 행동 자체에 주목하므로 그 사람을 직접 비판하는 느낌이 적습니다. 반면, ‘너는—‘이라고 시작하면 상대방을 직접 비판하는 느낌이 강합니다. 만약 그런 점까지 생각하고 쓴 글이라면 제 번역은 글쓴이의 의도를 무시한 게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어떻게든 읽고 있는 문장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도저히 쓰인 문장만으로 이해가 어렵다면, 번역을 해야 합니다.
거꾸로 글을 쓸 때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독자가 번역하는 수고를 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단한 작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쓴 한 단어, 한 문장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열혈 독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큰 고민 없이 쉽게 읽히는 글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쓰려는 글이 읽는 사람에게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는 ‘시’이거나 ‘시적 에세이’가 아니라면, 최소한의 번역 과정을 거쳐 이해될 수 있는 글을 써야 그나마 남들이 한 줄이라도 더 읽어주지 않겠습니까?
쉽게, 짧게, 정확하게, 읽는 사람을 위해서 써보세요.
'쓰기에 관해 > 잘 쓰고 싶습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강_주제어와 화제 (0) | 2019.03.01 |
---|---|
18강_결론과 뒷받침 (0) | 2019.03.01 |
20강_분석과 비평 (0) | 2019.03.01 |
21강_논쟁과 비판 (0) | 2019.03.01 |
22강_견해와 신념 (0) | 2019.03.01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17강_주제어와 화제
17강_주제어와 화제
2019.03.01 -
18강_결론과 뒷받침
18강_결론과 뒷받침
2019.03.01 -
20강_분석과 비평
20강_분석과 비평
2019.03.01 -
21강_논쟁과 비판
21강_논쟁과 비판
201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