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서 없는 독서 수업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필독서 없이 읽기 수업을 한다. 대신 한 문단이라도 생각하면서 읽는 연습을 한다. 학생들은 각자 수준에 맞는 책을 직접 택해서 읽으면 된다. 뭘 읽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가끔은 만화책이라도 읽으라고 한다.
한국 학생들은 생각보다 책을 많이 읽는다. 국어 학원에서 강제로 필독서를 정해서 검사를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읽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읽으면 안 읽은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학원에서는 책을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 평가' 같은 것들을 한다. 학생들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미리 문제를 풀어서 가야 한다. 학생들 말을 들어보면 학교에서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진다고 한다.
대치동에는 내신과 독서논술을 함께 하는 학원들이 많다. 같은 반 학생 여러 명이 유명 학원에 함께 다니는 일도 잦다. 같은 학원에 다니닌 진도에 따라 같은 책을 읽는다. 쉬는 시간이면 학생들이 열심히 책을 뒤적이는데,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 평가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고 한다. 문제를 풀고 숙제 검사를 받기 위한 읽기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니 독서논술 몇 년을 해도 생각하는 힘은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읽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면서 읽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짧은 글을 읽게 한 후에 궁금한 모든 것을 질문하게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읽은 것에 관해서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다. 학생들마다 질문의 내용이 다르고, 수준도 다르다. 그 질문들의 답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수업을 하다 보면 몇 페이지 읽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도 상관없다. 읽으면서 생각을 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못 읽은 부분은 다음에 읽으면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라 독서를 지도한다.
-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책을 읽는 습관을 만든다.
- 책에 흔적을 남기면서 자기 책이라는 인식을 만든다.
- 아무리 짧은 책이라도 노트를 작성하면서 읽는다.
- 독서를 마친 후에는 반드시 글을 쓴다.
- 읽은 책과 자신의 삶을 연결하여 의미를 찾는 훈련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한 권을 제대로 읽으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열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정약용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몇 년 전부터 독서에 대해 자못 깨달은 바가 있는데 헛되이 마구잡이로 읽으면 하루에 백 권, 천 권을 읽어도 오히려 읽지 않음과 같다. 모름지기 독서란 한 글자라도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을 만나면 널리 고찰하고 자세히 살펴 그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 정약용, <두 아들에게 답함>
글쓰기 없는 독서는 깊이가 없다. 생각한다는 것은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즉, 글을 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을 할 때는 허공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쓰기를 시작해야 한다. 읽은 것을 자기식으로 정리할 때만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을 계속 고치면서 생각을 다듬고,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쓴 글을 여러 번 고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열 번 넘게 고치는 학생도 많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한 편의 글을 썼을 때, 비로소 독서가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내가 읽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평생 독서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고쳐 쓴 글은 문장의 숲에서 확인할 수 있다.